매일묵상

제목2020년 7월 3일 에이든 토저-하나님을 추구함: 5. 우주적 임재2020-07-0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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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3일 에이든 토저-하나님을 추구함: 5. 우주적 임재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7)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속에 거하시며 모든 그의 작품들 가운데 어느 곳에서나 떼어낼 수 없게 존재하신다. …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범신론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의 종합이라고 한다. … 하나님은 그분의 세계 안에 거하지만 그 세계와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으로 분리되어 있다. … 하나님이 모든 그의 작품 안에 편재하실지라도 그는 그것들 위에 뛰어나시다. (p. 68-69)

-잠깐 신학적 설명을 첨부하겠습니다. 범신론(Pantheismus)은 자연 모든 만물이 신이라는 생각입니다. 흔히 고대 신화나 민속종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형태이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지 그 세계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범신론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세상과 분리해버리기 시작하면, 이신론(Deismus)이라는 계몽주의적 신앙관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냥 우주를 창조하고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이 되어 버리지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신 초월적인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계에 참여하시는 내재적인 분이십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범재신론(Panentheismus)이라 부르는데, 물론 이런거 몰라도 하나님 믿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여기에 계신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다. 그가 계시지 않는 장소는 아무데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 문제는 우리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 … 임재와 임재의 나타남은 같지 않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곳에 계심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곳에 계신다. 우리가 그의 임재를 알 때, 그때에라야만 그는 명백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을 보여주시는 것이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p. 70-72)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영원히 애쓰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소의 가까움이 아니라 관계의 가까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점점 자라가기를 위함이요, 하나님의 임재를 좀더 완전히 의식하기 위함이다. (p. 73-74)

 

*위대한 성도들을 떠올려보라. 모세와 이사야, 엘리야와 다윗, 요한과 바울, 성 프란체스코와 마르틴 루터, 피니와 토마스 아 켐피스는 얼마나 다른가? 종족, 국적, 교육, 성격, 습관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한 가지 중대한 자질은 영적 수용성이었다.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강권했다. … 그들은 내적 갈망을 느꼈을 때 그것에 관해 무슨 일인가를 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은 평생토록 지속될 영적 반응이라는 습관을 가졌다. 그들은 거룩한 비전에 반항하지 않았다. (p. 74-75)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계적인 방법을 적용하려 애쓴다. 성경 한장을 읽고 짧게 기도하거나, 어느 집회에 참석하고 남의 간증을 들으며 우리의 깊은 내적 파산이 메꾸어지기를 기대한다. (p. 77)

 

*어느 누구든지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라. 그로 하여금 거룩함에 관해 자기 훈련을 시작하게 하라. 신뢰와 순종과 겸손을 가지고 영적 수용력을 개발해보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메마르고 연약했던 나날들 가운데 그가 바라던 것을 능가하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p. 79)